1919년 1월부터 제1차 세계 대전의 뒤처리를 위하여 전승국들의 강화회의가 파리에서 개최되었다. 이 강화회의의 기본 원칙은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창한 14개조의 평화 원칙이었다. 그중에서도 민족자결주의 원칙은 식민지 상태에서 해방과 독립을 열망하는 약소 민족들에게 큰 희망을 안겨 주었다.
즉,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란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이나 국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권리를 실현하려는 사상이다. 그러나 이는 1차 대전 이후 패전국이었던 독일, 오스트리아 등이 다시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식민지를 내놓게 하고, 영국과 프랑스가 패전국의 식민지를 차지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의도였다. 따라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은 전승국의 식민지에는 적용되지 않았고, 패전국이나 러시아의 지배하에 있었던 일부 약소민족에게만 적용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민족자결주의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Q2. 다음 중 민족대표 33인이 아닌 사람은?
1. 손병희
2. 한용운
3. 이완용
4. 이승훈
민족대표 33인 [ 民族代表三十三人 ]
3·1운동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명의 민족대표. 1919년 2월 초 독립선언에 관한 일을 의논하기 위해 권동진·오세창·최린 등이 손병희를 만나 상의한 데 이어, 송진우·현상윤(玄相允)·최린·최남선 등이 독립선언 진행방법 등을 검토, 천도교·기독교·구한말의 유지를 조선민족대표로 하여 그 이름으로 독립을 선언하고, <독립이유서>를 각국에 보내기로 결정한 후 서명할 인사들을 찾아나섰다. 송진우·최남선은 구한말의 대신들을 만나 상의했으나 성과를 얻지 못해 민족대표에서 그들을 제외키로 했다.
한편 기독교 측은 이승훈, 천도교 측은 최린이 각각 교섭에 나서 많은 동지를 얻었으며, 이를 안 불교 측에서도 한용운·백용성 등이 가담, 결국 기독교 측 16명, 천도교 측 15명, 불교 측 2명으로 모두 33명이 <독립선언서>에 서명키로 하고 총대표에 손병희를 추대함으로써 민족대표 33인이 결정되기에 이르렀다.
한말 을사5적신의 한 사람이며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은 최악의 매국노로 불린다. 고종을 협박하여 을사조약 체결과 서명을 주도했고 의정부를 내각으로 고친 후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 헤이그특사사건 후 고종에게 책임을 추궁하여 물러날 것을 강요했고, 순종을 즉위시켰다. 총리대신으로 일본과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완용 [李完用] (두산백과)
Q3. 민족대표 3인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곳은?
1. 보신각
2. 태화관
3. 이화학당
4. 단성사
탑동공원의 팔각정을 중심으로 삼밭에 심 박히듯 학생들이 빽빽하게 들어섰다. 1897년 조성된 탑동공원은 이전부터 크고 작은 집회와 행사가 열린 곳이자 외국인들이 즐겨 찾는 명소였다.
한민족에게는 의미가 남다른 공간이기도 했다. 경기대 건축학과 안창모 교수에 의하면 대한제국 시기인 1902년에 건축된 팔각정은 고종 황제가 천자국(天子國)임을 선포하는 제사를 지낸 환구단의 황궁우를 쏙 빼닮도록 지은 구조물이었다. 또 대한제국의 군악대가 공원 서편에, 대한자강회를 잇는 대한협회가 공원 동편에 자리 잡은 역사적 장소이기도 했다. 1969년 3월 발행된 한국은행권 오십 원 지폐 앞면에 팔각정 모습이 그려진 이유이기도 하다. 이처럼 탑동공원은 조선이 당당한 자주국임을 대내외에 알리는 선언의 장소로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
오후 1시 30분경. 약속 시간이 다 돼 가는 데도 민족대표인 듯한 사람들은 탑동공원에 나타나지 않았다.
바로 그 시각, 민족대표들은 탑동공원에서 불과 300여 m 거리의태화관(서울 인사동)에 모였다.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후 민족대표들이 일경(日警)에 체포되는 과정에서, 탑동공원의 흥분한 학생·군중과 경찰의 충돌을 우려해 장소를 변경한 때문이다. 민족대표들은 무엇보다도 ‘비폭력’을 중요시했다.
조선총독부 [ the Japanese Government General of Korea , 朝鮮總督府 ]
조선총독부 청사는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 제국이 한반도에 대한 식민통치를 시행한 조선총독부가 최고 행정 관청으로 사용한 건물이다. 1910년 한일병합 이후 35년의 식민통치 기간에 조선총독부는 남산 왜성대와 경복궁의 총독부 청사 2곳과 용산, 경무대의 총독 관저 3곳을 비롯하여 관사 다수를 건립하였다.
총독부 청사는 1907년에 남산 왜성대의 통감부 청사를 총독부 청사로 전용하였다가 1926년에 경복궁 흥례문 구역을 철거하고 청사를 신축하였다. 경복궁의 총독부 청사는 대한민국 수립 이후 정부청사로 사용되다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전용되었다. 그 후 이 건물의 철거와 보존을 둘러싸고 갑론을박이 있었지만 1995년 김영삼 정부 때 철거되었고 건물의 부재는 독립기념관으로 옮겨져 보존되어 있다. 총독 관저는 1910년부터 남산 왜성대의 일본 공사관을 관저로 사용하였고 1908년에 건립된 용산의 관저를 별도로 운용하였으며 1937년에 경복궁 북쪽에 경무대 총독 관저를 신축하였다. 한편 1910년 이후 식민 통치 기구가 정비되면서 일본인 관리의 수가 증가하자 이들을 위한 관사가 대량으로 건설되어 보급되었다.
출처 : 위키백과 '조선총독부' (https://ko.wikipedia.org/wiki/%EC%A1%B0%EC%84%A0%EC%B4%9D%EB%8F%85%EB%B6%80)
Q5. 유관순 열사가 주도해 만세시위를 한 곳은?
1. 인천 황어장터
2. 창녕 이리장터
3. 충북 괴산장터
4. 병천 아우내장터
대한독립 운동에 눈을 뜬 유관순은 3월5일 학생단 시위에 참석했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혔으나 곧 석방됐고 3월13일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만세 운동의 소식을 고향 사람들에게 전하고 독립선언서를 내놓으며 충남 천안시 아우내 장터(병천시장)에서 벌일 운동 계획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유관순은 독립선언서를 구하기 위해 미리 서울까지 다녀왔으며 아픈 사촌 언니 몫까지 떠맡아 홀로 시위 연락을 담당했다.
후에 박인덕 이화학당 선생은 자서전을 통해 "유관순은 고향 마을 사람들과 주변 지역 사람들을 분기시키고, 태극기를 만들었으며, 장날 시위운동을 조직했다. 독립운동을 하자는 전갈을 전하기 위해 몇 십리 길 걷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며 영웅적 역할을 증언하기도 했다.
4월1일(음력 3월1일) 병천시장에서 열린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에서 유관순은 군중을 이끌며 만세 운동을 주동했다. 하지만 이날 일제 헌병의 총칼에 부모를 잃고 체포돼 징역 7년의 중형을 선고받게 된다. 전문가들은 일본이 재판장에서도 당당하게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밝힌 유관순에게 법정모독죄를 씌워 더 중형을 선고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1919년 4월 15일 화요일 이른 오후, 그 참혹한 사건이 일어났다. 학살의 주범인 아리다(有田俊史) 중위는 일본군 11명을 이끌고 제암리로 들어왔다. 그리고 15세 이상의 모든 마을 남성들을 제암리 감리교회에 모이도록 하였다. 교회에 모인 23명가량의 남자들은 무슨 일인지 걱정하면서 명령에 따라 바닥에 앉아 있었다. 잠시 후 교회를 둘러싼 군인들이 총을 쏘기 시작하였다. 교회 안에 있던 남자들의 대부분이 죽거나 심하게 다쳤는데도 일본군은 목조 건물에 불을 질러댔다. 청년 몇 명이 뛰쳐나왔지만, 곧바로 일본군의 총검에 찔리거나 총에 맞아 그 자리에서 사망하였다. 그렇게 탈출에 실패한 6명의 사체가 교회 바깥에서 발견되었다. 남편을 찾아 군인들의 포위를 뚫고 교회로 가려던 두 부인도 잔인하게 살해당하였다. 19세의 젊은 부인은 총검에 찔려 사망했다. 40대의 여성은 총에 맞아 사망하였다. 모두 기독교인이었다. 그 후 일본군은 마을에 불을 지르고 떠났다.
스코필드 박사는 영국 출생의 선교사이자 수의학자이다. 1916년, 아내와 함께 한국에 입국하여 세브란스 의전에서 세균학 및 위생학 강의를 하였다. 그때 한국 이름을 ‘석호필’로 지었다. 1919년에는 3.1 독립운동 장면을 촬영하여 해외에 알렸고, 일본인 주간의 영자신문에 일제의 정책을 비판하는 글을 기고하였다. 또한, 제암리 현장 답사 후 캐나다 선교부에 <제암리 학살 보고서>를 제출하여 참혹한 현실을 알리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는 서대문형무소에 방문하여 유관순 열사 등 3.1운동 관련 애국지사들을 격려하기도 하였다. 그 다음 해에는 캐나다로 돌아가 한국에서 자행되는 일제 만행을 캐나다, 미국에 알리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지금은 국립서울현충원의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제암리 주민들의 상처와 아픔을 보듬은 스코필드 박사는 34번째 민족대표라고 불린다.
[출처] [스토리 뉴스] 3.1운동 100주년, 제암리 사건을 되돌아보며|작성자 GPRESS (https://blog.naver.com/reporter_gg/221477020389)
Q7. 초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통합되지 않은 단체는?
1. 대한국민의회
2. 상하이임시정부
3. 대한광복군정부
4. 한성정부
1919년 3~4월에 국내외에서 도합 8개의 임시정부가 수립 선포되었다. 조선민국임시정부, 신한민국임시정부, 대한민간정부, 고려공화정부, 간도임시정부 등은 수립 과정이 분명하지 않은 채 전단으로만 발표되었다. 실제적인 조직과 기반을 갖추고 수립된 것은 러시아 연해주, 상하이, 한성의 임시정부였다.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것은 1919년 4월 11일이다. 일제로부터 국토와 주권, 국민을 완전히 되찾아 '정식' 정부를 수립할 때까지 한시적으로 '임시'로 세운 정부였다.